클레르 옵스퀴르: 33 원정대는 프랑스의 신생 개발사 샌드폴 인터랙티브가 4월 24일 발매한 게임이다. 나는 발매되기 전까지 그 존재를 몰랐는데(발매일도 방금 찾아보고 나서야 알았다), 발매 이후 여러 경로로 입소문을 들었고, 마침 게임패스에 데이원으로 나와 있다길래 해보기로 했다.
이 게임은 턴제 요소와 실시간 요소가 융합되어 있어 내가 어느 쪽 게임을 많이 했는지 밝히는 것이 좋겠다. 턴제 게임을 압도적으로 많이 했다. 작년에 깬 열몇개의 게임 중 대부분이 턴제 JRPG다.
본 리뷰는 스포일러가 대량으로 포함되어 있다. 또한 현재 메인 스토리 엔딩 이후의 컨텐츠는 거의 건드리지 않은 상태라 이에 대한 평가는 포함하지 않았다.
2. 좋았던 점 (장점)
2.1. 절묘한 리스크-리턴 설계
이 게임은 기본적으로 전투가 턴제로 진행되지만, 적이 공격하는 턴에 알맞은 타이밍에 버튼을 누르면 회피, 또는 패링을 해 대미지를 완전히 무효화할 수 있다. 패링이 회피보다 판정이 빡세고, 실패 시 빈틈이 커 리스크가 높다.
그러나 상대의 공격을 모두 패링할 경우 강력한 카운터 공격이 가능하며, 1회 패링 시마다 행동에 드는 포인트(AP)를 획득할 수 있다. 회피는 이 모든 혜택을 받지 않는다.
카운터의 매우 높은 위력도 물론 엄청난 리턴이지만, 성공 시 발동되는 매우 공들인 비주얼/사운드 이펙트가 진정 패링을 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이성적으로 회피를 누르는 게 옳은 상황에서도 자꾸 카운터를 시도하게 될 정도다. 그냥 타이밍 맞게 버튼을 눌렀을 뿐이지만, 뭔가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 좋은 착각과 손맛을 제공한다.
회피에도 누른 타이밍에 맞춰 ‘일반 회피’와 ‘완벽’으로 나뉘어져 있다. ‘완벽’ 판정은 패링 판정과 타이밍이 같으므로, 먼저 회피로 적들의 공격을 피하면서 타이밍을 익힌 다음, 모든 공격을 ‘완벽’으로 피할 수 있게 되면 패링을 시도하여 카운터를 날리는 것이 권장된다. 물론 나는 이런 차근차근 배우는 시스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뽕맛 때문에 멋모르고 패링부터 하고 들다가 전멸한 경험이 한두번이 아니다.
2.2. 다양한 시도가 가능한 육성 시스템
액션 못지않게 육성 시스템에도 상당히 공을 들였다. 무기에 파격적인 효과들을 부여하여 스킬과 조합해 다양한 시도들이 가능하며, 패시브 스킬들의 커스텀 폭이 넓다.
베르소의 예를 들면, 무기 ‘듀얼리소’를 끼면 기본 공격을 한 이후 한번 더 행동이 가능하고, ‘기본 공격 시 획득하는 행동 포인트(AP) 증가’ ‘기본 공격의 타격 횟수 증가’ 패시브를 조합해 AP를 거의 날로 먹을 수 있다. 조준 사격을 쓸 기회도 늘어나는 등 유틸성도 강력하지만, 기술로 나오는 대미지가 낮다는 단점은 떠안아야 한다.
2.3. 최신 게임에 걸맞은 편의성
요즘 JRPG 트렌드를 따랐다. 적어도 스토리 클리어에 노가다는 필요없고, 희귀 아이템 드랍도 없다. 그럭저럭 빠른 이동도 가능하며, 포인트로 강화하는 요소는 비교적 쉽게 리셋할 수 있다.
치유 아이템은 체크포인트를 지나면 상한 개수만큼 보급되는 방식을 따르고 있다. 종류가 한정되어 있고(엘릭서 등의 파티 단위로 작용하는 아이템이 없고), 3인 파티라 한 턴을 아이템만 쓰고 넘긴다는 것이 부담스럽게 설계되어 있으며, 필드에서는 쓸 수 없어 적절한 긴장감이 유지된다.
ATLUS 게임을 많이 했던 나로서는 전투 UI에서 페르소나 시리즈의 흔적을 보고, 레벨업 시 능력치를 자율 분배하는 시스템에서 진 여신전생 시리즈의 흔적을 보았지만 오히려 좋다. 좋은 것만 배워 왔다.
2.4. BGM
음악 퀄리티도 그 자체로 역대급이라고 할 만하지만 더 대단한 것은 음악을 쓰는 타이밍이다. 특히 보스전이 시작될 때 음악의 강렬한 도입부를 까는 연출이 압도적이다.
오케스트라가 메인이지만 그렇다고 일변도는 아니다. 제스트랄 마을에 가면 재즈 곡을 가끔 들을 수 있다.
2.5. 특이한 연출, 그러나 보편적인 소재
이 게임의 컷씬에는 흑백으로 전환되는 장면이나, 화면에 레터박스가 나타나는 등 영화를 의식한 연출이 많고, 인물들의 대사도 직관적이지 않은 편이라 다소 난해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스토리의 중심 소재는 다섯 가족의 비극이라는 보편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어, 아무 정보 없는 1회차만으로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본질을 파악하기는 어렵지 않다고 느꼈다.
아래에서 다룰 ‘엔딩 논쟁’도 결국 등장인물들에 쉽게 공감할 수 있도록 되어있어 일어나는 일인 것 같다.
2.6. 프랑스어 더빙
프랑스어는 거의 알지 못하는 상태지만, 영어 이외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음성 언어가 프랑스어라 이번엔 그쪽으로 해봤다. 특히 르누아르와 대치하며 감정이 폭발하는 장면에서 진가를 느꼈다. 이 게임을 거치고 Oui, Non, On Continue, Monami, Famille, Compliqué, Putain(…), Attension 등의 단어를 알아간 건 다행이려나. La famile c’est complique(가족은 복잡하죠).
각종 X번 원정대가 등장하지만(33, 60, 0, 46, 81, 78…) 결국 숫자 세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 그 사람들 숫자를 너무 어렵게 센다.
2.7. 적절한 볼륨
처음 ‘25~30시간이면 깬다’는 정보를 듣고 볼륨은 큰 기대를 접었는데, 워낙 그 내용이 강렬하고, 달리 즐길거리도 많은 요즘이라 이 정도 볼륨이면 오히려 장점이라는 생각도 든다.
3. 아쉬웠던 점 (단점)
3.1. 탐험의 답답함: 던전 미니맵 부재
처음 게임을 하며 당황했던 점은 미니맵의 부재였다. 던전에 던져놓고 알아서 찾아가라고 하니… 월드에 나오면 월드맵이 제공되는 것은 다행이지만, 최종 던전에 갈 때까지도 어느새 왔던 길을 자꾸 되돌아가는 나를 볼 수 있었다.
월드맵도 ‘미니맵’이 제공되지는 않고 따로 지도 메뉴를 열어 수시로 확인해야 하기 때문에, 샛길로 빠지거나 목적지를 지나치는 일이 꽤 있었다.
갈림길이 거의 없는 외길 구조고, 체크포인트가 적절하게 설치되어 있기 때문에 결국에는 목적지에 찾아갈 수 있게 설계되었다는 느낌은 든다. 미니맵이 있으면 화면을 안 보고 미니맵만 보게 된다는 제작자 측의 입장도 공감 못할 바는 아니다.
3.2. 일부 ‘점프맵’의 불편한 조작감
일부 치장 아이템을 얻는 맵에 국한되지만, 옛날에 마인크래프트 점프맵을 하며 고통받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맵이 존재했다. 캐릭터의 필드 조작감이 좋지는 않은 편이라 집착하면 상당한 스트레스에 빠질 수도 있겠다.
3.3. 다소 지루한 관계 레벨 이벤트
페르소나 시리즈의 커뮤, 또는 코옵 시스템을 연상시키는 개인 스토리가 있다. 이벤트 내용이 기본적으로 야영지에서의 대화를 벗어나지 않는데 내용이 짧지 않게 느껴지고, 스토리의 막이 변화할 때 모든 캐릭터의 개인 스토리 진행 상황이 한꺼번에 해금되기 때문에 숙제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그런데 각 캐릭터의 심경을 알아보려면 끝까지 봐 둬야 도움이 되기 때문에 거를 수도 없는 부분.
3.4. 서브 퀘스트의 낮은 접근성
게임 깨고 인터넷을 찾아보니 ‘이런 곳이 있었다고?’ ‘이런 퀘스트가 있었고 이런 아이템을 준다고?’ 싶은 부분이 많았다. 요즘 게임에 흔한 ‘?’ 퀘스트 마크가 없어서 그런 것 같다. 이것도 미니맵이 없는 거랑 같은 맥락으로 의도된 게 아닐까 싶기는 한데…
4. 호불호가 갈리는 항목
4.1. 2막 이후의 반전에 대해
2막에서 ‘페인트리스’를 쓰러뜨리면 끝인 줄 알았던 나는 놀라 자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페인트리스는 일종의 창조주라, 없애버리면 세상이 망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동료가 되었다고 생각했던 베르소는 이를 미리 알고도 동료들에게 알려주지 않는다.
‘사실 이 세상은 캔버스 속이고…’ 이게 꽤 충격적이었다. 현대나 근미래가 배경이면 VR이라는 것이 있으니 예측이 가능할 지도 모르겠지만 설마 벨 에포크 배경으로 이런 스토리를 가져올 줄이야.
그런데 암시는 꽤 깔려있다. 게임 제목인 ‘클레르 옵스퀴르’는 미술 용어인 ‘명암법’이고, 중반부터 등장하는 ‘그라디언트 공격’은 화면의 모든 색채를 빨아들인 다음 방출하는 스킬군이다. 월드맵의 일부 로케이션은 지금 보면 ‘캔버스’ 모양이다. 던전 바닥에 널브러진 원정대원들의 시체는 일반적인 그것이 아니다. ‘페인트리스’는 지금 보면 매우 직관적인 이름이고, 자주 대립하게 되는 ‘르누아르’도 프랑스의 대표 화가를 떠올리게 하는 이름이다.
‘3막 이전의 모든 내용을 부정하는 반전 아니냐’, ‘구스타브가 너무 쉽게 소모되었다’는 말도 있지만, 나름 중요 인물을 맡다가 허무하게 퇴장하고 나서 나중에 언급조차 안 되는 인물들을 다른 작품에서 너무 많이 보았다. 구스타브 정도면 마엘의 이후 행동에 꽤 영향을 끼칠 정도는 되었으니 괜찮은 처지라고 본다.
4.2. 엔딩
스토리가 끝으로 치달으면 플레이어는 중요한 선택을 요구받는다.
베르소의 편을 들어, 어찌보면 추잡하고 이기적인 가족 다툼의 결과물이기까지 한 이 캔버스 속 세계와, 그리고 가족들의 진짜 ‘베르소’에 대한 미련으로 빚어진 존재나 다름없는 ‘가짜 베르소’인 자신을 같이 없애느냐.
마엘의 편을 들어, 캔버스 밖 세계로 나가면 기다리고 있을 ‘그냥 거기 존재하기만 할 뿐인, 모든 것을 잃어버린 비참한 삶’을 거부하고 캔버스 안에서 안녕을 추구하느냐.
우유부단한 나답지 않게 이번에는 아주 간단히 마엘의 편을 들었다. 뒷배경이 어찌되고 무슨 사연이 있고 심지어 그들이 그냥 가상 세계의 인간이더라도, 베르소 말대로 다 없애버리는 것은 동료들에 대한 배신이자, 마엘이 얻은 새 삶에 대한 끔찍한 부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현실을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갈 순 없고, 이야기의 주인공 또한 예외는 아니라고 나는 느낀다.
얼마 후 다른(베르소) 엔딩도 세이브를 불러와서 따로 봤다. 굳이 따지자면 그림 속에 남은 마엘의 운명에 대해 강렬한 연출로 부정적인 암시를 주는 마엘 엔딩보다는 희망적이긴 한데, 그렇다고 그림 속에서 그대로 사라진 동료들이 훈훈히 보내주지도 않고(루네는 끝까지 베르소를 노려본다), 지금까지의 모든 이야기가 그냥 가족사의 한 페이지로 전락한다는 점을 특별히 부정하지도 않아서 불만은 없다.
누가 그렇게 말했다.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가 개봉했을 때 분위기를 보는 것 같다고… 물론 두 결말 다 부정하는 사람도 봤지만 확실히 비슷한 것 같다.
5. 총평 및 추천 대상
다른 JRPG에서 본 익숙한 요소가 많고, 특히 많이 언급되는 턴제와 실시간의 융합도 완벽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진하게 묻어나오는 프랑스 특유의 연출과 감성으로 ‘흔한 JRPG 1’에서 벗어나, 적어도 내 기억 속에는 강하게 남을 것이다.
올해가 아직 절반 넘게 남았지만 지금으로서는 33 원정대의 고티로 가는 길을 막기 쉽지 않아 보인다. 아마 동키콩과 사무스 정도가 막아볼 수 있지 않을까?
다른 게임이 올해의 게임이 된다면 그것 또한 재밌을 것 같다. 이걸 넘는 게임이 2025년에 또 나왔다는 뜻이니까.
내가 해본 것 중에서는 오랜만에 나온 ‘아무한테나 추천할 만한 게임’인 것 같다는 말로 리뷰를 마친다. 오죽하면 Steam으로 사지 않아서 내 스팀 가족들(20대 남성 6명으로 구성)에게 포교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이게… 단돈 5만 5천원!!